📖 비극, Ch. 1

테리 이글턴, ⟪비극⟫(Tragedy, 2020)

서문

• 비극 연구서 저술의 학적 의의. 위대한 예술과 근본적인 도덕적·정치적 쟁점들이 긴밀하게 맞물린 곳, 비극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치를 두는 것의 척도. 비극은 예술 형식 가운데 귀족이지만, 이 저술은 그것을 민주화하려는 시도

• 개인적인 이유. 예술의 비극과 일상생활의 비극 사이의 관계, 아버지의 죽음의 그늘에서 비극 예술 연구를 시작. “죽음으로부터 삶을 끌어내는 것”(draw life from death)

• 잰 마시Jan Marsh “시험관들은 비극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나봐.”

1. 비극은 죽었는가(Did Tragedy die?)

“그것은 가공할 종류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드물고 특별한 운명이 아니었다. 압도하면서 불멸로 만드는 운의 손길이 아니었다. 그저 일반적인 불운의 낙인에 불과했다.”(헨리 제임스Henry James, ⟪정글의 짐승⟫The Beast in the Jungle)

• 일상적 의미와는 달리 예술적 의미의 비극은 매우 구체적인 사건. “비극이라는 형식은 시간을 초월한 인간 조건의 반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문명이 아주 짧은 역사적 순간 동안 자신을 괴롭히는 갈등과 씨름하는 형식으로서 나타난다.”

• 정치적 제도로서 등장한 비극. 헬라스에서의 비극은 정치적 제도이면서 동시에 공적 제도의 건립이나 확보와 관련 — 장 피에르 베르낭Jean-Pierre Vernant, 피에르 비달 나케Poerre Vidal-Naquet, “도시가 극장으로 변하는” 문제. 라이너 프리드리히Reiner Friedrich, “비극의 텍스트는 폴리스의 시민 담론이라는 더 큰 텍스트의 일부가 된다.” 훗날의 비극은 대부분 공식적인 정치적 제도가 아니다. 

• 18세기 독일.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Wihelm Meister)와 고트홀트 레싱Gotthold Lessing의 극 이론은 국가 연극의 필요성을 반영, 레싱에게 연극은 공적 도덕과 공동의 정체성이라는 감각을 육성. 비극적 드라마는 국사國事, 권위에 대한 반역, 공격적인 야망, 궁정의 음모, 정의의 침해, 통치권을 위한 투쟁[주권sovereignty을 향한 투쟁struggle]을 다룬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비극을 관객에게 잘못하면 사회를 파괴할 수도 있는 어떤 감정(연민과 공포)을 엄격하게 통제된 양만 먹이는 것으로 간주한다. — 정치적 동종요법(political homeopathy). 폴리스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감정적 무기력을 정화하는 공적 치료의 한 형태를 제공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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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적 비극 개념

  • 신화와 운명, 제의와 피의 희생, 중대한 범죄와 영웅적 속죄, 악과 구원, 질투심 많은 신과 순종적인 희생자의 문제. 무시무시한 고난은 고귀한 느낌을 주며 관객은 교화되어 극장을 나선다.

  • 고전적 비극의 예술 형식. 우리를 두렵게 하는 힘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비극적 재료의 형태를 만들고, 그것과 거리를 두고 정화하고 압축한다. 사건들을 허구화하는 것은 잠재적 보편성을 부여하여 비극적 사건의 모든 혼돈과 우연성 속에서 섭리의 작용을 희미하게 분별할 수 있게 한다. 

  • 중세와 르네상스 비극 이론은 고귀한 태생의 주인공이 번영에서 불행으로 몰락하는 것이 이 형식에서 핵심이라고 본다. 

• 근대에 이르러 비극적인 정신이 쇠퇴. 세속적 가치, 계몽된 정치, 인간사의 합리적 운용, 우주의 궁극적 불가해성을 믿는 시대에는 비극이 살아남을 수 없다. 산문적인 시대의 중심에서 영적으로 더 고양된 사회질서의 기억 흔적 역할을 한다.

• 근대 부르주아 비극이라는 형태와 비극 개념의 재규정

  • 19세기 프랑스의 자연주의적 소설가들인 에드몽Edmond de Goncourt과 쥘 드 공쿠르Jules de Goncourt 형제, 부르주아 비극 혈통의 계승자들. “‘비극’이 정말로 죽은 것인지… 아래에서 흘리는 눈물이 높은 데서 훌리는 눈물만큼 쉽게 눈물을 끌어낼 수 없는 것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 비극은 영웅적 어조나 신고전주의적 관습이나 인물의 사회적 지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진정성에 의해 규정된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슬프다”는 정도도 비극적일 수 있게 된다. 

  • 고전적 비극에서 실생활에서의 참사가 비극적이려면, 예술에 의해 형태가 잡히고 거리가 두어져 어떤 더 깊은 의미가 풀려나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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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의 죽음’을 둘러싼 논변들

  • 고전 비극이 보여주는 것들. 우주[kosmos]를 법칙에 따르는 조화로운 곳으로 보는 관점, 숭배, 경외, 복종의 정서를 기른다, 오만한 이성[hybiris]에 대한 비판, 비관주의나 과학적 결정론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천박한 결정론을 거부하는 한편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도 거부, 인간은 외부의 힘에 놀아나는 장난감이 아니지만 최고 수준에서 자기를 책임지지도 않는다, 희망이 있지만 낙관주의로 기울지 않는다, 냉소주의와 승리주의 사이에서 경로를 잡는다, 연민과 공포는 고양시키는 감정이며, 감상적 인도주의가 아니다, 지식보다 지혜, 명료함보다 신비[mystērion], 역사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보편적인 것], 계몽주의의 어두운 밑면, 계몽주의자의 빛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표현, “인본주의적 합리주의의 일반적 의미론에는 이질적인 것”, 사회적 개혁가와 정치적 유토피아주의자에 대한 묵살(rebuff), 사물의 어두운 핵심을 들여다본 사람들의 성숙한 환멸, “리어의 운명은 유료 노인복지주택을 충분히 세우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 “정치는 어떤 갈등은 없앨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고통과 절망이 발생하지 않게 할 수는 없다.”

  • 고전 비극의 해체. 비극적 드라마의 중대한 쟁점은 윤리와 심리로 바뀌었다, 비극에 마지막 결정적 한 방(coup de grâce, 허약해졌거나 악화되었던 것에 종지부를 찍는,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온정적 결정타)을 날린 것은 희망이라는 종말론적 비전을 가진 기독교, 과학과 세속주의가 문제의 암살자, 비극은 서구 연극에서 중심적인 흐름이었던 적이 없다, 비극은 개인이 힘의 한계를 잔인한 방식으로 깨닫지 않고는 번창할 수 없다(알베르 카뮈), 현대 세계는 숨은 신(deus absconditus)의 극장, 비극적 자유와 존엄이 흔적 없이 사라진 존재론적 심연, 홀로코스트, 근대 후기의 전반적인 의미 상실, 포스트모더니즘의 깊이 없고 탈중심적인 주관성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없다.

  •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모두 비극의 쇠퇴에 관여했다는 비난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모두 불의한 세계가 자신의 구속救贖(redemption)에 바쳐야 할 대가를 의식한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과 자기를 버리는 과정을 통과해야만(a passage through death and self-abandonment) 비극 너머의 미래에 이를 수 있다. 마르크스에게 갈등을 헤치고 나가는 것은 복구 불가능한 상실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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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의 헬라스적 특수성. 비극은 고대 그리스 비극과 공화주의 사이의 유기적 유대에서 생겨났으며 그런 정치적 조건을 재현할 수 있어야만 되살아 난다(프리드리히 횔덜린), 고대의 위엄에서 감상과 선정주의로 쇠퇴한 상황, 자신들의 봉기의 빈약한 내용을 두고 자신을 속이고자 하는 마음에 쫓겨 익살극과 파토스의 혼합물로 “자신의 열정을 위대한 역사 비극의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려”한 근대 부르주아 혁명가들(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비극은 역사적 특수성을 가지며 오직 고대 그리스 비극만이 진정으로 그런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다(베냐민, ⟪독일 비극적 드라마의 기원⟫), 근대가 비극적 예술을 생산하는 과제를 감당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슈미트, ⟪햄릿이냐 헤쿠바냐⟫), 비극은 고대 그리스인 특유의 것이며 불과 백여 년 뒤에는 아리스토텔레스마저도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장 피에르 베르낭), 비극은 인간 조건의 현실을 포착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예술적이고 역사적인 조건들이 무대에서 그것을 재현하는 데 우호적이지 않다, 비극적 예술은 모든 문명에 공통적이지 않다. 

• 비극의 변이. 비극적 행동은 내면화되고 심리화되고 개인화된 것이며, 이는 고대 그리스 연극과 모순된다(프리드리히 셸링), 비극적 과정 전체가 역사적 조건이 아니라 존재의 내적 상태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갈등과 반역은 대체로 내적 문제이다, 현대 비극론의 특징은 주인공의 절대적 자기 책임, 즉 비극적 개인주의(쇠렌 키르케고르, ⟪이것이냐 저것이냐⟫), 셰익스피어의 비극적 예술은 운명의 엄격한 전개가 아니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던 불행한 환경에서 나온다, 화해는 더 내적이고 심리적인 일이다, 운명이라는 관념이 근대의 무작위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에 대한 감각에 패하여 사라지고 나서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예술은 이제 가능하지 않다(헤겔과 그의 철학적 적수 프리드리히 니체가 공유하는 편견) 

• 근대성에 의한 비극의 생명 연장. 모든 이가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고난에 대한 이런 민주화된 비전에서는 은행 직원이나 상점 여직원의 영혼도 중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힘들이 자신을 완전히 소진하는 전장이 된다”, 이성의 한계, 한때는 자주적이었던 인간 주체의 연약함과 자기 불투명성, 통제 불가능한 수수께끼 같은 힘들에 노출된 상황, 힘과 자율성에 가해지는 제약, 인간의 행복에 완전히 무관심해 보이는 익명의 ‘타자’ 안에서 찾아야 하는 기원, 다원적 문화 안에서 선들의 불가피한 갈등, 인간이 주는 피해가 장티푸스처럼 퍼질 수 있는 사회질서의 복잡한 밀도와 같은 조건들, 원죄의 감각, 파우스트적 갈망 

• 이 시대의 비극을 위한 조건들. “일군의 미심쩍인 가정 전체를 잘라 내야 한다.”(비극이 불굴의 인간 정신의 승리를 제시한다는 가정, 역경과 마주하는 것은 항상 담금질되고 잘못을 깨닫는 과정이라는 가정, 그런 극단에서만 인간성의 바닥이 드러난다는 가정, 겉으로는 순수한 불행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을 통하여 섭리적 질서의 윤곽이 드러날 수 있다는 가정) 죽을 위험에 처하거나 심각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인상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위기에 처한 인간성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새롭게 해줄 수 있다, 어떤 사건이 비극적이 될 자격을 갖추기 위해 거기에 존엄이나 고귀함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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