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공화정

📖 로마 공화정

Jun 17, 2024

데이비드 귄David M. Gwynn, ⟪로마 공화정⟫(The Roman Republic: A Very Short Introduction, 2012)

크리스토퍼 켈리Christopher Kelly, ⟪로마 제국⟫(The Roman Empire: A Very Short Introduction, 2006)

제1장 안개에 싸인 과거

제2장 공화정이 형태를 갖추다

제3장 남성, 여성, 그리고 신들

제4장 카르타고를 파괴해야 한다

제5장 지중해의 여왕

제6장 제국의 비용

제7장 언어와 이미지

제8장 로마 공화정 최후의 시기

제9장 로마 공화정의 유산

제2장 공화정이 형태를 갖추다

❧ ‘로마의 원로원과 인민’(Senatus Populusque Romanus, SPQR)이라는 혼합정체의 성립

  • 왕정 이후 로마를 지배한 귀족 계층은 파트리키particii로 알려진 대가문들. 이들 가문에 속한 구성원들만이 종교적 직책이나 정치적 직책을 보유할 수 있었으며, 다른 시민은 플레브스plebs(평민)로 분류

  • 시간이 지나면서 부유한 평민들이 정치권력에 있어 동등한 몫을 요구하며 광범한 평민 집단을 소집, 사회적·정치적 권리 확보를 위한 평민들의 투쟁은 서기전 5세기초부터 3세기 초까지 진행된 ‘신분 투쟁’(Conflict of the Orders)으로 알려짐

  • ‘평민들의 철수’. 민회(Concilium Plebis)를 소집할 수 있게 되었으며, 평민들의 권리를 보호해줄 대표자인 호민관을 선출할 권한

  • 12표법. 서기전 450년경. 채무 때문에 로마 시민을 노예화하는 행위가 법으로 금지, 모든 시민은 행정관의 결정에 맞서 ‘인민에 항소할 수 있는 권리’(provocatio ad populum)를 지니게 됨

  • 서기전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Lex Hortensia). 평민회의 ‘결의’는 혈통 귀족을 포함한 전 주민을 구속할 수 있는 ‘법’이 되었다. 

  • 서기전 367년 평민이 집정권(consul)에 입후보할 자격을 허용하는 법안 통과, 첫번째 평민 집정관은 366년에 선출, 342년부터는 2명의 집정관 중 1명은 반드시 평민이어야 했다. 

  • 공화정의 지배 계층 확대로 행정관, 원로원, 민회라는 세 가지 핵심 요소 확립

❧ 행정관

  • 2명의 현직 집정관은 명령권(imperium) 보유, 국가의 정치적·군사적 수장. 원로원을 주재, 법안 발의, 전장에서 군대를 지휘, 임기는 1년. 로마 귀족 경력의 정점

  • 법무관(praetor), 조영관(aedilis), 재무관(quaestor), 10명의 호민관(Tribunus Plebis). 5년마다 선출된 2명의 감찰관(censor)은 전직 집정관이 담당했으며 임무를 수행할 때만 직책을 보유했고 기한을 18개월을 넘지 않았다. 

  • ‘관직의 사다리’(cursus honorum). 엘리트들 사이에서 관직 경쟁은 치열했으며 탁월한 개인들을 여러 차례 기존 규정들에 도전

  • 독재관(dictator). 비상 시기에 국가를 감독할 더 우월한 명령권을 보유, 임기는 6개월을 넘길 수 없었다.

❧ 원로원

  • 집단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행정관들은 원로원의 지도에 따르는 것이 상례. 행정관 자신이 원로원의 일부였으며, 통상 임기를 마친 후 의원의 역할을 다시 수행

  • 중요한 결정 사항들은 항상 원로원에서 먼저 토의. 대외 정책, 민사 행정, 재정 감독

❧ 민회

  • 원로원이 제안한 결정 사항들을 확인, 승인

  •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집정관과 법무관 선출, 전쟁 선포

  • 평민회(Concilium Plebis). 호민관 선출

“호전적인 원로원 엘리트들이 이끄는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지배 세력이 되었고, 나아가 더 넓은 지중해 세계를 재패했다. 이것은 로마에 승리를 가져다주었으나, 동시에 로마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제국을 건설한 정복 과정에서 압력이 발생하였고, 공화정 구조는 이를 결코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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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카르타고를 파괴해야 한다

❧ 포에니 전쟁의 주요 경과

  • 제1차 포에니 전쟁을 통해 공화정은 군사적·경제적 압박을 견디며 재기를 위해 국가를 탄력성 있게 운영할 수 있음을 입증. 전쟁이 끝나자, 시칠리아는 세공을 부담하는 로마 최초의 속주가 되었다. 법무관이 총독에 취임, 1명의 재무관이 총독을 보좌하여 세금과 소규모 주둔군을 감독, 기존의 사회·정치 구조를 유지하고 지역 엘리트들을 통해 통치하는 단순하고 융통성 있는 체제

  • 제2차 포에니 전쟁으로, 로마 공화정의 탄력성과 함께 이탈리아의 동맹국들에 고취시킨 충성심이 재확인. 그러나 로마는 엄청난 인력을 잃었고, 이는 농업 사회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끼쳤다. 사회적 격변은 로마의 팽창으로 인한 부의 증대와 결합해 다음 세기에 로마의 내부 위기를 심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입양한 손자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Aemilianus의 지휘하에 로마는 서기전 146년 카르타고를 함락시켰다. 카르타고의 북아프리카 영토는 이제 로마 공화정의 속주가 되었다.

❧ 포에니 전쟁을 밀고간 요인들

  • 로마 사회는 전쟁과 정복으로 인한 경제적 보상을 기대하는 쪽으로 조정되어 있었으며, 귀족층은 군사적 ‘영광’을 얻으려 경쟁. 군대를 지휘한 이들은 집정관들이었으며, 모든 중요한 결정들은 원로원에서 토의, 로마를 전쟁에 몰아넣은 이들은 원로원의 귀족층

  • 한 개인의 권위와 ‘영광’이 원로원의 집단 지배권을 위협할 정도의 위력을 지니게 되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자마 전투를 치르기 전에 집정관이 되었으며, 집정관에 선출되기 전에 보통 요구되던 하위 관직들을 전혀 거치지 않았고, 파비우스 막시무스 같은 연로한 동시대인들을 제치고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모든 원로원 엘리트의 경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군사 지도자들’. 자신의 카리스마, 부, 그리고 ‘영광’을 통해 원로원 집단과 경쟁할 지위를 갖게 된 인물들


제5장 지중해의 여왕

❧ 동지중해에 대한 로마의 태도

  • 로마인은 단순히 그리스인을 정복하기를 원치 않았다. 로마인은 그리스인이 자신들을 야만인(barbaroi)이 아니라 문명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이길 원했다. — 그리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 그러나 동시에 로마 공화정은 매우 야심적인 원로원 엘리트들이 이끄는 공격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세력

  • 서기전 202년 카르타고가 패배하자, 200년에 로마는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 이 때 로마 민중은 싸우기를 원치 않았으나 전쟁을 추진한 것은 특정 집단, 특히 현직 행정관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을 통해서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필적할 수 있었으며, 자신들의 경쟁 심리에 의해 촉발된 지위와 ‘영광’을 획득할 수 있었다. 

  • 마케도니아는 속주가 되었고, 코린토스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 로마의 지배는 궁극적으로 동지중해 세계에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몇 세기 후에 그리스어를 말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비잔틴 제국은 스스로 로마의 계승자임을 자랑스럽게 선포했다. 

❧ 폴뤼비오스Polybios

  • ⟪역사⟫(Historiai). 로마에 볼모로 머물면서 집필. 동포 그리스인들에게 로마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로마에 반대한 자들을 기다리는’ 운명을 피할 것을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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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제국의 비용

❧ 위기의 씨앗

  • 부와 ‘영광’에 대한 경쟁이 엘리트 전반으로 확대. 서기전 180년 빌리우스 법, 야심적인 귀족들을 통제하기 위한 ‘관직의 사다리’ 구조 공식화, 행정관직에 오를 수 있는 법정 연령 설정

  • 서기전 2세기에는 로마 사회 내에 별도의 집단으로서 기사 계층(equites)이 등장. 이들은 본래 기병대에서 복무하던 부유한 시민이었고 원로원 의원들과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이후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였으나 원로원 가문의 지위를 얻지 못한 별도의 사회계층은 공식적으로 법으로 분리.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같은 거대 무역도시들이 파괴되면서 성장, 공화정 후기 로마의 사회와 정치에서 두드러진 역할

  • 경제적 팽창이 공화정의 통합과 안정을 위협. 귀족의 대토지와 노예 노동의 확장은 인구 증가와 더불어 로마 공화정 군대의 중추가 되는 로마와 이탈리아의 소농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 군벌의 출현

  •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 ‘신인’(homo novus), 즉 그의 가문에서 집정관 직에 오른 최초의 인물. 유구르타 전쟁에서 활약. 이후 마리우스의 부관이자 경쟁자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가 유구르타 왕을 생포함으로써 전쟁 종결

  • 마리우스는 로마 군대를 재조직함으로써 로마는 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통일성을 갖춘 전문 군대를 갖게 되었다. ‘마리우스의 당나귀’, 군의 대형 개선, 강력한 전문 보병 부대인 ‘로마 군단’의 출현. 군대의 사병화, 즉 사회적·경제적 압력으로 인해 지위와 영광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몰두하는 자들에게 봉사하는 사적인 군대들

  • 술라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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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로마 공화정 최후의 시기

❧ 공화정 몰락의 요인들

  • 갈등은 내부에서 비롯. 로마의 팽창 동력이었던 귀족 간의 경쟁 그리고 ‘영광’과 ‘위엄’의 압박. 사병화된 군대들, 점점 늘어가는 부로 인해 격화된 경쟁, “결국 한 사람의 수중에 위엄, 부, 군사적 지배권이 집중될 때까지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 “공화정의 몰락은 불가피한 운명이 아니었다. 이것은 야망과 자기희생, 천재성과 어리석음이 섞여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이다.”

  • 술라는 공화정을 지속하기 위한 개혁을 완수하고 나서 서기전 79년 자진해서 관직을 사임하고 개인의 생활로 은퇴. 필요한 것은 공화정 체제를 견고히 다지기 위한 평화와 안정이었으나 귀족들의 경쟁과 로마 제국의 규모 자체 때문에 이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목표

❧ 삼두정과 카이사르

  •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의 삼두정. 이후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대결. 카이사르는 서기전 46년 북아프리카의 탑수스에서 공화정 수호자들의 군대를 무찔렀고, 45년에는 폼페이우스 지지자들과 전투를 벌여 승리

  • 카이사르가 단독 지배자로 통치하는 동안 행한 일들. 속주 행정과 징세 체계 재조직, 로마 시민권의 확대, 군대 퇴역병들을 정착하시키 위한 식민시 건설, 율리우력 배포, 일자리 제공과 공공사업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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